불가능에 도전하는 비만 팬더의 악전고투기 혹은 유쾌한 쿵푸드림실현기

[Movie Story]
1. 비만 팬더가 용의 전사(쿵푸마스터)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스토리
젠장, 이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저 먹는거밖에 모르고 엄청나게 뚱뚱해 계단 오르는것도 힘에 부치는 국수집 출신 비만 팬더가 쿵푸 마스터가 되어 악당을 물리치고 최강의 전사가 되겠다니... "꿈은 이루어진다"는 우리의 그 유명한 월드컵 구호가 있긴 하지만, 구호는 구호일뿐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거나 냉혹하기에 너무 이야기가 허무맹랑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설정에 비약과 우연이 난무하는 엉성한 스토리로 알맹이는 하나 없고, 이거 뭐 대충 D라인 몸매를 가진 비만 팬더 한마리의 캐릭터와 CG로만 승부(?)하려는거 아닌지 하는 그런 우려와 함께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쿵푸 팬더의 스토리는 앞서 말한대로 단순하고 좀 설정이 황당하다. 평화의 계곡에 살고 있는 뚱땡이 팬더 포는 국수가게를 하며 가업을 잇기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뒤로하고 쿵푸에 푹 빠져 산다. 어느 날 쿵푸의 성전 제이드 팰리스에서 개최하는 용의전사 선발대회 구경을 갔다가, 무예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5인방제자(타이그리스-호랑이, 멍키, 크레인-학, 맨티스-사마귀, 스네이크-뱀)들을 제치고 우연하게(혹은 운명처럼) 용의전사로 뽑히게 된다. 포는 비천한 출신과 형편없는 무예로 갖은 시기와 고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무예를 배우고 용의문서에 담긴 비급을 깨달아 악당 타이렁을 물리치고 마을의 평화를 지켜낸다.

2. 불가능에 도전하는 비만 팬더의 악전고투 -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디다스 TV광고를 보면 "Impossible is nothing"이라고 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이야기인데 불가능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라니, 사실 아무리 광고라지만 그 한 문구만 보았을 때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친절하게 다른 부가 카피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느낌이 좀 달라진다.

불가능,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 하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불가능,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불가능, 그것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가능, 그것은 사람들을 용기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쿵푸 팬더에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포의 눈물겨운 노력은 정말 악전고투 그 자체다. 어찌어찌하다 용의 전사가 되었지만 주위의 시기, 질투, 방해는 물론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열등감, 자괴감은 포를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과 서로가 서로를 믿는 신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만 팬더는 일취월장하며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단기간에 무예를 익혀 쿵푸의 달인이 된다. 사람이 얼마나 시시껄렁하면 애들이나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걸 느끼냐고 이야기할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포를 통해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새삼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유쾌하고 웃고 즐기면서 말이다.
 

3. 꿈은 이루어지는가? - 이루었다 못이루었다가 중요한게 아니다.

세상은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살라고 하고, 그런 사람들을 뭔가 특별하고 아주 대단한 사람인양 추앙한다. 하지만 먹고 사는 "생활"이라는 기본적인 문제조차 쉽게 해결하기 힘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자기 꿈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서 또 한편으로 세상은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살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어설픈 이상 따위는 집어치우고 자기 분수에 맞게 현실적으로 살라고 더 많이 이야기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쿵푸팬더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수가게를 하며 우리 집안은 혈관에서도 육수가 흐른다는 포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포에게 국수 만드는 일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국수가게만 하면 별다른 고민없이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기에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포는 쿵푸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다며 끝내 국수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다수가 가는 편한 길이 아닌, 자기 꿈을 이루겠다는 소수자의 길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때는 내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살아가기도 하고 설사 그 꿈이 무엇인지 안다 하더라도 꿈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꿈을 꾸는것은 돈 드는 일도 아니고, 한번쯤 미친듯이 도전해 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내 일상과 삶은 비록 비루할지라도, 황금빛으로 가득찬 또 다른 삶의 꿈을 꾸어본다는게 미친짓이거나 죄는 아니다.

쿵푸팬더에서 포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었지만, 나는 꿈을 이루었다 못이루었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루어내면 더 좋겠지만 꿈은 그냥 꿈으로만 끝날수도 있고 못이룰수도 있다. 아마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가 무서워 꿈조차 꾸지 않고 살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 우울한거 아닐까...?

꿈이 없는 시대, 그저 생활에 매몰되어 밥벌이, 돈벌이에 치여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내 일상이 곤궁하게 느껴진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무조건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행동으로 실천해 볼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보고 계획을 짜보는것도 좋을 것 같다.

4. 유쾌하고 재미있는 쿵푸드림실현기

처음 우려(?)와 달리, 쿵푸의 "ㅋ"자도 모르는 비만 팬더가 쿵푸 고수가 되어 악당을 물리치고 평화를 지킨다는 스토리의 이 영화는 황당무게한 스토리와는 별개로 솔직히 말해 나를 감동시켰다. 유쾌하게 웃을 수 있어 좋았고, 다 알고 있지만 실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의 교훈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어 더 좋았다.

엊그제 쿵푸 팬더를 보고 온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인 조카에게 이 영화가 재미있는거 말고 느낀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여조카의 대답은 "이모부, 뭐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을거 같구요, 또 포기해서는 안되는거 같아요" 였다. 그렇다. 초등학생도 아는 이 쉬운 교훈을 나는 내 생활에서 너무 잊고있거나 혹은 모른체하고 살았던거 같다.

쿵푸는 어렵지 않다. 누구든지 꿈을 꾸고 열심히 노력하면 쿵푸 마스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주먹을 내지르거나 간단한 발차기 정도는 내 것으로 만들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작은 꿈이든 큰 꿈이든 꿈을 가지는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꿈도 못꾸며 살기에는 우리 한 번 뿐인 인생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

나니아 연대기 혹은 욕망의 연대기

[Movie Story]

1. 욕망에 대한 단상 -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해하거나 불행해 한다. 본능이라는 것은 가르치거나 배워서 아는게 아니다. 그냥 아는 것이다. 본능은 다른 비슷한 말로 충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본능이나 충동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처음 "하고싶다"에서 내부의 욕망이 더 커지면 이것은 압력이 되어 "하여야 한다"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더 나아가면 "반드시 해야한다"로 바뀐다. 이렇듯 본능이나 충동은 그것이 옳든 그르던지 간에 한방향으로 몰아가는 속성이 있다.

인간 활동의 근원은 충동(본능)에서 기인하는게 많고, 충동이 만족될 때 즉 하고 싶은 것을 할수 있을 때나,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욕망이 충족될 때 인간은 행복하다.

나니아 연대기(캐스피언 왕자)는 그런 인간 속성이 참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비록 판타지라는 장르의 옷을 입었지만, 인간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혹은 충동(본능)을 극복하고 얼마나 훌륭해 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2. 줄거리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중인 영국, 나니아에서 현실로 돌아온 게 1년이 지났지만, 페벤시 남매는 아직도 그 곳을 잊지 못하며 살고있다. 그때 나니아에서는 왕위 계승자인 캐스피언왕자가 왕위을 빼앗으려는 교활하고 잔혹한 삼촌 미라즈에게 쫓기게 되고 페벤시 남매를 나니아로 소환하는 나팔을 불어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나니아는 페벤시 남매가 떠난 이후 1,300년이 지나 황금기가 끝나고 텔마린족(인간)에게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캐스피언과 페벤시 남매는 나니아인과 세력을 규합해 미라즈 군대와 불리한 전투를 하게 되지만, 다시 나타난 아슬란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후 페벤시 남매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캐스피언 왕자는 왕이 된어 나니아는 평화를 되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욕망의 피해자 -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형을 죽이고 그 아들까지 죽이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죽는 미라즈왕]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욕망의 피해자

나니아 연대기에 있어 주요 사건은 "내가 왕이 되고 싶다"는 하나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왕이란게 무엇인가? 절대 권력으로 만물(?)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자... 남자라면 알것이다. 군대에서 장교도 아닌 말단 사병이면서도 왕고참인 병장만 되어도 얼마나 절대적이면서 한편으로 달콤한 권력이 생기는지 말이다. 하물려 왕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형을 암살하고 아직 왕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1인자가 된 텔마린족의 미라즈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 왕위를 자기 아들에게 주려고 형의 친자이자 왕위 계승자인 캐스피언 왕자를 죽이려 한다.(캐스피언만 없으면 자신도 왕이 되고, 그 왕위도 자기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다) 결국 미라즈는 그 욕망을 쫓아 친조카인 캐스피언을 나니아인과 결탁한 배신자로 누명을 씌워 왕국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이 왕이 된다.

미라즈 휘하에 있는 영주 소페스피언도 호시탐탐 왕이 되고자 한다. 이 욕망은 텔마린족의 장군 글로젤과 공모해 미라즈왕을 나니아인과의 전투에서 피터와 1:1 결투를 하게 만들고, 글로젤 장군은 결투에 졌으나 캐스피언의 용서를 받아 목숨을 건진 미라즈를 몰래 살해해 버린다. 소페스피언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글로젤은 미라즈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자신의 부하들이 미라즈로 인해 죽게 되자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미라즈를 죽여 버린다. 욕망은 이렇듯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혈육도 충성과 신뢰로 서로 의지해야 할 군신관계도 다 발톱에 낀 때만큼도 못한 걸로 만들어 버린다.

캐스피언이나 피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캐스피언과 피터는 처음에 서로 반목한다. 자기 생각이 맞다고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나니아인을 통솔하는 리더쉽을 두고 서로 경쟁하며 미워한다. 캐스피언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욕망으로, 피터는 자기가 다 맞고 자기가 시키대로만 하면 텔마린족을 이길 수 있다는 자만과 오만의 욕망으로 수많은 나니아인을 전투에서 죽게 만든다. 그게 미라즈든 캐스피언이든 피터든 욕망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4. 욕망의 극복자
사람이 너무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빠지다 보면 맹목적이 된다. 다른 가치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 충동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만 행동하게 된다. 사람이 그러하다면 동물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제라는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가치있다는 것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산다.

캐스피언은 미라즈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여 복수할 수 있는 순간에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용서를 택한다. 피터 역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캐스피언과 함께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겸손이라는 가치를 배운다. 이 모든 것이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욕망을 절제할 수 있을때에라야만 인간은 무분별한 행복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안한 행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욕망의 극복자 - 캐스피언과 피터 모두 "절제"라는 가치로 욕망을 극복해 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나니아 연대기- 욕망에 대한 교훈적 시선을 가진 영화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해하거나 불행해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 같지만, 한 겹 더 들어가서 살펴보면 결국 이것은 각자의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무분별한 욕망은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절제된 욕망은 행복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어떡할 것인가? 욕망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에 지배당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 단상들]

1.영화 중간 중간에 조금 지루한 부분이 몇 군데 있는 편이다.

2.나무들이 텔마린족 군사를 멸하는 장면을 보면서는 반지의 제왕이 오버랩되어 좀 싱겁게 느껴졌다.

3.하얀마녀도 잠깐 등장하는데, 너무 빨리 아웃(?)되어 약간 섭섭했다.

4.생쥐 기사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오버해서 첨엔 귀여웠으나 나중엔 호감이 반감되었다.

5.전투씬을 나름 신경쓰긴 한 거 같은데, 요즘은 어지간해선 감흥을 잘 못느끼겠다.

6.이 영화 역시 CG가 지대한 역할과 비중을 하고 있다. CG없으면 영화도 못만드는 세상이 점점 더 빨리 다가 올 거 같다.

,

스피드 레이서–필름 테크놀이라는 신장르 혹은 테크놀러지에 점령당하고 있는 스크린

[Movie Story]
나는 자동차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차 욕심도 많다. 비록 내 현실 속의 차는 슈퍼카나 럭셔리카와는 거리가 먼 남루하고 소박한 차이지만, 모터트랜드나 탑기어, 자동차생활 같은 자동차 잡지를 매달 2-3권씩 사보며 고성능 울트라 슈퍼카에 대한 동경(?)을 키워갈 정도니 관심이 꽤 많다고 할 수 있겠다..


스피드 레이서를 보았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만들었다는 사실과 거기에다 자동차 경기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이 내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에 놓칠 수가 없어서 개봉일에 바로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스피드 레이서의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자동차 레이싱을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처럼 신성시 하는 가족기업
레이서 모터스와 자동차와 레이싱을 승부조작을 통해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대기업 로얄튼 그룹의 대결이 주된 이야기이다.

주인공 스피드(에밀 허쉬)는 천부적인 레이서로 로얄튼 그룹 회장(로저 알람)과의 대결 속에서 결국 승리를 거두는데, 이 밑바탕에는 헐리우드 특유의 가족애와 정의는 승리한다는 도식적인 공식이 자리잡고 있다
.

솔직히 이야기해 스피드 레이서의 스토리는 진부하고, 발생하는 사건들에 있어 플롯이라 할 만한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조밀함은 보이지 않았고, 각 캐릭터들은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한 객체가 아니라 화려한 영상의 부속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화(시나리오)의 양대 축으로 흔히 플롯과 캐릭터를 이야기 하기도 하는데, 스피드 레이서는 플롯 중심(사건 발생과 그 연결고리들이 주는 치밀함, 즉 사건의 향방)의 영화도 아니고 캐릭터 중심(주인공의 운명과 그 변화 과정)의 영화도 아니다. 물론 아예 그런 부분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영화상에서 플롯이나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비하다는 이야기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플롯과 캐릭터 보다는 볼거리가 화려하고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주는 영상 중심의 영화다. 플롯과 캐릭터, 스토리는 그냥 영상에 짜맞추어진 구색 맞추기라고나 할까? 아무리 영화가
일부러 원작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핵심만 뽑아서 간소화하고 실감나는 레이싱 경주 장면에만 역량을 집중했다 하더라도, 워쇼스키 형제의 명성과 매트릭스가 주었던 낯설고 충격적이었던 영상 기법과 거기에 더해진 주제의 심오함을 생각해 본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려한 CG로 영상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볼만한 영화, 스피드 레이서]

나의 이런 인색한 평가를 워쇼스키 형제가 들었다면,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야 그냥 우리가 좋아했던 원작 만화를 충실하게 재연하고 가족용 영화로 부담없이 누구나 보기에 좋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볼멘 목소리를 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실 나도 화려한 영상이 주는 즐거움과 격투기를를 방불케 하는 자동차 경주 장면만으로도 일정 부분 만족스럽게 본 부분도 있으니 이렇게 평가에 꼭 인색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본질이 화려한 영상미가 전부는 아닐진데 다른 부분들은 점점 희석되고 영화가 CG라는 테크놀러지에 점점 종속되어는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 씁쓸한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의 한 장르로 필름 누아르
(film noir)가 있다. 필름 누아르는 미국 헐리우드에서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1940년대 뒷골목을 배경으로 갱, 범죄, 폭력이 주된 내용인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를 이야기한다.(필름 누아르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1980년대에 홍콩에서 홍콩 누아르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허무와 절망, 음산함, 불안함 등을 주로 표현하는 누아르는 현대 사회의 비정함과 비인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형식과 내용이 다분히 그럴수 밖에 없다 하겠다.


스피드 레이서를 보고 나서, 나는 문득 스피드 레이서를 필름 테크놀(film technol) 장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컴퓨터 그래픽(CG)을 기반으로 스토리, 플롯, 캐릭터 같은 영화의 내적 요소 보다는 테크놀러지의 힘을 빌려 화려한 영상에 집중하는 영화의 흐름을 통칭하는 의미에서 말이다
.

그 정점에 주인공 자체도 사람이 아니라 로봇인 트랜스포머가 있고, 최근 개봉한 아이언맨, 스피드 레이서 역시 트랜스포머 못지 않게 CG로 모든 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국산 영화로 작년에 개봉한 디워도 포함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G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 만약 필름 테크놀이라는 장르가 있다면, 그 시발점이자 논란의 여지없이 원조로 기록될만한 영화, 트랜스포머]


기술 발전과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를 살다 보니, 이제 영화의 본질 자체도 꽤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무엇을 담고 있느냐 보다는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흐름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전에는 애니메이션으로 보거나 상상만 해볼 수밖에 없던 것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즐거움이 있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영화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내 생각이 너무 진부하고 고루한 것일까
?


스피드 레이서를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한 나의 이러한 고민이 점점 더 커져간다. 이러다가 테크놀러지에 스크린이 완전히 점령 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철학과 영혼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키는 테크놀러지가 진정한 테크놀러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그리고 또 그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삼국지 용의부활-한 영웅에 대한 서사시

[Movie Story]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있을까?  자신의 생이 다한다는 것만큼 오싹하고 서럽고 처량한 건 없는거 같다. 더구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일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신념 때로는 미친듯한 열정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삼국지-용의 부활을 봤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같은 영웅서사시를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상산 조자룡이라는 한 영웅의 주요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신의와 의리,  충성, 명예,신념 같은 이제 이세상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가치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국지 용의부활의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지러운 전란의 시기에 촉군에 무명의 병사로 합류한 조자룡은 용맹함과 뛰어난 무술로 신임을 얻고, 조조군을 피해 달아나던 유비의 식솔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자를 1만적군 사이에서 종횡무진하며 혈혈단신으로 구해내는 공을 세우고 이후 승승장구해 오호장군의 최고 위치까지 오른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함께 하던 오호장군들중 관우, 장비, 황충, 마초도 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조자룡만 홀로 남아 마지막으로 왕의 명령을 받들어 삼국통일을 위해 전장에 출전한다. 하지만 쇠약해진 국력과 내부의 배신으로 조조군에게 포위당하게 되고 조조의 손녀 조영과 마지막 일전을 치루다 생을 다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꽤나 단순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 내용과 많이 다른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삼국지 원전 자체도 허구가 가미된 소설이라고 본다면 영화에서의 이정도 변주(?)쯤은 용인할만 하다 하겠다.

영화속의 조자룡은 의리와 충성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나중에 자신을 배신하지만 형님으로 생각하고 아끼던 나평안(홍금보)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유비의 아들을 구하러 1만 대군 사이로 홀로 나서고, 삼국통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신념과 충성심으로 나라를 위해 한평생 전장을 누비며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자기삶을 희생한다.

그러한 삶이 좋은것인지 나쁜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돈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의리, 신념, 사랑도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버리는 요즘 세상의 가치관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의리를 챙기고, 사사로운 물욕을 위해서 신념을 가지고 덤벼들며, 사랑도 조건화시킨다. 전문가들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경제살리기"와 "뉴타운공약"같은 걸로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나라당에 대해 요즘 세태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잘 파악한 "욕망의 정치"로 승리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이제 도덕이니 고결함이니 하는건 그냥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일 뿐인 세상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조자룡이 참 안쓰러웠다. 나평안(홍금보)의 부주의로 유비의 식솔을 잃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물어 나평안을 처형하려 하자, 조자룡은 고향 형님인 나평안을 대신해 자기가 유비의 가족을 찾아오겠다고 나선다. 엄청난 적군이 눈 앞에 있고 나가면 거의 죽음이 목전인데,  왜 죽을줄 알면서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을 대신해 유비의 아들을 구하러 갔을까?  또 노년에 접어들어 후방에서 편히 쉬면 될걸 그 삼국통일에 대한 신념이 무어 대단하다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부득불 뛰어 나간단 말인가? 조자룡은 내 기준에서 보면 참 융통성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또 아름다워 보였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고, 또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삼국지는 용의부활은 조자룡을 통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의리, 신념, 충성, 명예 이런 것들은 목숨을 다해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것이라고...

,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현재의 당신이 있다-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

[Movie Story]

지나간 사랑은 유통기간이 지나버린 통조림처럼 덧없고 쓸쓸하다. 더블샷 에스프레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씁쓸하다. 왜냐하면 지나간 사랑, 지나간 날들은 다시 돌아오거나 되돌릴 수 없는 추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 만약 그사람과 잘 되었더라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볼지도 모른다.

시간만 잘 맞았다면,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혹은 그때 그것만 있었더라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다. 지나가버린 사랑은 유통기간이 지나서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는 유통기간이 훌쩍 지나버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학생때 만난 고향 여자친구 에밀리,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뉴욕으로 와 클린턴의 선거운동을 도우며 알게된 당돌하고 자유분방한 에이프릴, 에밀리의 친구로 우여곡절끝에 사귀게 된 지적이면서 저돌적인 여기자 섬머...


영화의 주인공 윌(라이언 레이놀즈)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세사람과 모두 엇갈리게 된다. 에밀리는 일에 대한 야심때문에 헤어지게 되고 에이프릴은 막 서로 사랑이 시작될 즈음 윌이 섬머에게 빠져서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섬머는 윌을 배신(?)하고 상처만 주고 떠난다.


세월이 흐른 뒤 윌은 어느날 우연히 첫 여자친구 에밀리와 재회하게 되고 결혼을 해 귀엽고 이쁜 딸 마야까지 두게된다. 하지만 이혼을 목전에 두고있는 윌은 딸 마야와 이런저런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 에이프릴이라는 걸 깨닫는다. 다행히 딸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에이프릴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데.....


문득 윌이 처음부터 에이프릴과 잘 되어 결혼을 했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에밀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러운 딸 마야의 존재는 아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딸 마야가 이혼을 앞둔 아빠는 불행하고 엄마랑 행복하지 않아 아빠의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에 윌은 이야기한다. 나의 해피엔딩은 마야 너라고... 윌의 입장에서 보면 온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마야를 생각한다면 에이프릴과 잘 되지 않고 에밀라와 결혼하게 된게 잘 된 것일수도 있다. 인생이 이런 것인가 보다. 하나를 잃고 또 하나를 얻고...



또 영화 속에서 결혼이라는 건 누군가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는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데 결혼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시점에 그때에 자기곁에 있는 적당한 누군가와 결혼하는 거라고 에이프릴은 이야기한다. 그 말대로 운명같은 건 없는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숨쉬는 순간 순간 우리는 어떤 운명같은 걸 찾는다. 불확실하고 아슬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운명이야말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누군가에게 나를 단단히 동여멜수 있는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운명을 믿는가? 100%는 아니더라도 우리 삶속에는 운명같은 그 어떤 무엇이 있다고 나 역시 믿는다.


윌은 에밀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소중한 딸 마야의 도움으로 에이프릴과 운명처럼 재회해서 다시 사랑을 하게된다. 결혼에 운명같은 건 없다는 에이프릴의 결혼에 대한 비관적인 이야기가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마야라는 하나의 해피엔딩에 다시 찾은 사랑 에이프릴이라는 해피엔딩을 하나 더해서 말이다.


해피엔딩이 하나도 아니고 두개인 만큼 그 여운과 기쁨이 해피엔딩이 하나뿐인 영화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크다 하겠다.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는 그래서 특별하다....


우유부단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일궈낸 윌과 귀엽고 똑똑한 그의 딸 마야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 에이프릴과 착해보이는 윌의 전처이자 마야의 엄마 에밀리 모두에게 행복한 앞날이 함께 하기를 기원해본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지나가버린 사랑때문에 혹은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들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야기 해주고 싶다.사랑했던 날들, 지난 기억 속의 날들, 이제 돌아올수 없는 날들, 엇갈린 인연처럼 스러져간 날들... 이 모든 것이 긴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한순간의 추억으로 밖에 남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기억들과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현재의 당신이 있다고 말이다.


,

때론 돈과 시간 모두가 아까운 영화가 있다.

[Movie Story]
영화 한 편에서 모든 걸 기대할 수는 없다. 화려한 볼거리, 액션, 진한 감동, 이런 저런 잔재미, 반전, 섬세한 심리묘사 등등.....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이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을 영화 한 편에서 다 맛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영화 한 편 안에서 이런 것들을 다 느끼고 볼 수 있게 하는 영화라면 10점 만점에 12-13점은 되는 정말 잘 되고 훌륭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특수효과나 볼거리가 화려하면 시나리오가 영 꽝인 경우가 많고, 감동적이거나 스토리가 탄탄한 영화에서는 대체로 스펙터클한 화면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경우가 많다. 요는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나 역시 영화를 볼 때 그런 점들을 충분히 감안하고 보는 편이다. “오아시스”같은 영화에서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지 않고, “맨인블랙”같은 영화에서는 진한 감동 같은 걸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오늘 본 “레인 오브 파이어” 도 그런 관점에서 스펙터클한 화면과 액션 뭐 이런 것들을 기대했을 뿐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았다. 특히 감독과 배우들이 모두 한 가닥 씩 하는 사람들이었고, 예고편도 그런대로 봐줄 만 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은근히 기대를 했다. 그러나 웬걸...


알록달록 화려하게 생긴 맛나 보이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군침을 흘리다 입 안에 넣었는데 너무 맛이 형편 없어서 얼굴을 찡그려 본 기억들이 있는가? “레인 오브 파이어”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의 느낌이 꼭 그러했다. 도대체 뭘 하자는 플레이(Play)인지....


공룡하면 “쥬라기 공원”과 “고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는 “아마겟돈”같은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눈높이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관객 앞에서 보여지는 익룡의 모습과 불꽃 액션(?)은 너무 초라했다. 영화 배경은 2000년대 초, 급속도로 번식하는 익룡이 출현하고 인간과 싸움을 벌이는데 핵무기까지 사용했지만 익룡을 퇴치하지 못하고, 지구는 황폐화 되고 극소수의 인간만 살아남아 힘겹게 살아가는 2084년의 미래이다.


여기에서 나의 관심사는 인간과 익룡의 전투 장면, 화려한 볼거리, 이것 밖에 없다. 하지만 초기의 익룡이 지구를 정복(?)해가는 몇 십년의 과정을 감독은 딸랑 TIME지 표지 사진, 신문 기사와 사진 몇 개로 딸랑 처리해 버리는 참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익룡은 딱 2마리만 잡힌다. 그것도 석궁에서 발사한 폭탄 화살에 맞아 죽는다.(핵폭탄에도 끄떡없고 각종 최신 무기들도 두 손 들었던 그 익룡이 말이다) 탱크도 몇 대 나오지만 그걸로 전투를 하지는 않는다.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불에 타 전복된다. 찬조 출현한 헬기 한 대 역시 사람만 태우고 익룡을 유인한답시고 이리저리 오가다 쏙 사라지고 만다. 예고편에 나왔던 수백마리의 익룡은 마지막 부분에 딱 3초 정도 나온다. 그것도 그냥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으로...


맥빠지는 뻔한 스토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부분들... 다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공룡 영화라는 꼬리표를 붙였으면 최소한의 볼거리는 보장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내가 돈과 시간을 들이는 만큼 어지간해서는 영화 보면서 편견을 가지지 않고 즐겁고 보고 느끼려고 하는 편이지만, “레인 오브 파이어”는 한마디로 돈과 시간 모두 열라 아까운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굳이 뭔가를 찾는다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원하는 게 뭘까? 아니,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걸까? 그리고 영화는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질문을 간만에 해봤다는점이다.
,

연애소설-기억하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잊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 하는 걸까?

[Movie Story]
기억하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잊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 하는 걸까?


가끔씩 지난 날들과 지나가버린 사람들을 생각할 때가 있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이따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난다.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할 때는 앞으로의 일들을 알지도 못한 체, 그저 맹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잊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걸 털어 넣는 데만 열중하기 때문이다.


헤어짐을 전제로 만나는 만남은 넌센스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이든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기에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막상 그런 순간이 자신의 눈 앞에 닥치고 나서야 허둥거리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는다. 단지 이 때는 앞서 말한 지난 날들, 지나가버린 사람들의 목록에 누군가의 이름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다.


이제 스물하고 여덟 해를 보낸 별로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생(生)이지만, 가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나는 흠칫 놀라게 된다. 정말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나는 만나고 헤어지고 그랬던 것 같다. 개중에는 정말 잊기 힘든 아니 잊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변으로 비켜나가 지금은 이름과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다.


“연애소설”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제목이 좀 통속적이면 어떠하랴? 우리 삶 자체가 다분히 통속적인걸... 참 오랜만에 가슴이 아프고 뭔가 텅 빈 듯한 아련한 느낌을 맛보았다. 줄거리가 어떻고, 주인공들의 심리가 어떻고, 영화 장면 장면과 주인공의 어떤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이런거다 하는 등등의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이 영화는 그냥 느끼면 된다. 굳이 분석하고 의미를 찾고 따질 필요가 없다.


현실과 소설 사이의 차이점은 뭘까? 교과서적 지식으로 보면 현실 세계에 있을 만한 일을 꾸며 적은 글이 소설이라고 배운 것 같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이나 영화는 현실보다는 조금 환상적일 경우가 많다. 요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일들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꽤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대리 만족적인 재미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를 즐겨보는 이가 꽤 될 것이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환상은 흔히 사랑 혹은 연애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연애는 다분히 소설적이다. 다른 사람과는 별 의미 없는 작은 것 하나도 그 사람과라면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고 기쁨이 있고 심지어 황홀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그 또는 그녀의 목소리, 어쩌다 스치는 손끝, 우연히 마주친 눈동자... 이런 사소한 모든 것들이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황홀한 사건(?)들이기 때문에, 연애가 충분히 소설적임을 증명해주는 하나 하나의 작은 증거들이다.


영화 “연애소설”은 연애소설의 기본 줄기들을 충실히 따라갔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쉬워하고, 잊지 못하고... 지환(차태현)은 홀로 남는다. 지환은 앞으로 살아 가는 동안 내내 잊지 못하고 또 가슴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가슴에 아로 새겨진 기억들은 그를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큰 힘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는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 중에서)”라는 말도 있고, “당신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한 사랑에서 거부당하면, 수백개도 넘는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세상에는 수 많은 진실한 사랑이 있다.(레오버스카글리아의 'LOVE' 중에서)”라는 말도 있다.....
,

놀란 감독의 전혀 놀랍지 않은 영화, 인썸니아(Insomnia)

[Movie Story]

서 태지가 “난 알아요”를 들고 나왔을 때 우리 대중음악계에 일으킨 반향은 단순히 “신선함”내지 “충격”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물론 랩이라는 그 당시에는 익숙치 않았던 독특한 음악 형식이 가져다 준 신기함(?)도 일정 부분 있었겠지만, 그 보다도 우리 말의 어법과 리듬에 어색하지 않게 랩이라는 음악 형식을 잘 접목시킨 점이 더 큰 것 같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2집은 어떠했는가? “하여가”를 타이틀 곡으로 내세운 2집은 전작과는 또 다른 독특한 형식미와 스타일을 담아내어 서태지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인 썸니아”를 이야기하는데 "서태지", "난 알아요" 같은 이야기는 해서 무엇하냐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인썸니아”가 “메멘토”를 만들었던 감독이 바로 다음 후속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격한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독창적이고 개성이 철철 넘치는 형식미를 선보였던 “메멘토”를 “인썸니아”와 비교해보면 서태지의 “난알아요”와 “하여가”같은 비슷한 상관 관계를 찾기에는 역부족임을 느낀다.


전 작에서 너무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앞서 갔던 것일까? “메멘토”를 보고 나서 감독의 이름과 상관없이 감독의 재능에 엄청나게 “놀란” 나에게 “인썸니아”는 너무 초라해 보인다. 단순한 스토리는 둘째 치고라도 살인자 핀치로 분한 로빈 윌리암스는 심지어 미스캐스팅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알 파치노의 노련한 연기 빼고는 긴장이나 스릴, 반전 모든 면에서 “메멘토”와 비교했을 때 내게 전혀 놀람과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문 학, 음악, 영화 등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 칭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형식 + 내용”으로 단순화 시킨다면, 개성과 스타일은 이 “형식”에서 파생되고 우리가 느끼는 감동과 재미는 “내용”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쪽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각각의 맛이 틀려지겠지만 일반적으로 잘 된 좋은 작품은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잘 이룰 때일 경우가 많다. “메멘토”가 그러했고, “난 알아요”, “하여가” 가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인썸니아"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내가 “메멘토”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재미, 설레임, 놀람을 다시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서태지는 나에게 늘 새로움을 보여주었기에....


P.S: 영화에 점수를 준다면 @@@(5개 만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