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A타운에서의 하룻밤

[Life Story/living]
1

이제 스물하고 다섯 해를 보낸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생(生)이지만, 가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나는 흠칫 놀라게 된다. 정말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나는 만나고 헤어지고 그랬던 것 같다. 개중에는 정말 잊기 힘든 아니 잊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변으로 비켜나가 지금은 이름과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다. 나는 본래 '운명'이니 '필연'이니 하는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단어들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을 치장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A타운에서 딱 한 번 만나고 헤어졌던 그녀를 다른 곳도 아닌 천만이라는, 죽을 때까지 세어도 그 수를 다 셀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엄청난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는 서울의 한 복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운명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또 그냥 우연이라고 해버리기는 뭔가 부족한 그 어떤 무엇이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2
   
"이것 봐, 코퍼럴(상병) 리! 저기 멀리 게이트가 보이지? 이제 다 왔군."
"그렇군요. 젠장, 엉덩이가 시트에 눌러 붙는 줄 알았어요. 빨리 샤워부터 하고 시원한 맥주 한 병 마시면 원이 없겠어요."
"하하하, 겨우 맥주? 군산은 처음이라고 했지? 두고 보라구, 오늘 내가 멋진 밤을 보내게 해줄 테니까. 지금까지의 피로가 그냥 싹 가실 거야!"
윌슨 하사는 다시 한 번 호탕한 웃음을 짓고는 액셀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더 내기 시작했다. 갓 이병을 달고 자대배치를 받은 이래 줄곧 1년 반 동안 같이 일을 한 윌슨 하사는 조지아주의 애틀란타 출신으로 30살의 백인이었다. 미국인치고는 좀 둥근 얼굴에 아랫배가 살짝 나온 그는 말을 재미있게 하고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군인보다는 TV 토크쇼의 사회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쨌든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다 중퇴하고 군에 입대한 그는 8년의 군생활 중 한국에서 근무한 게 3년이 넘었다. 지금은 이혼했지만 부인도 한국 여자여서 그랬는지 쌀밥과 김치, 불고기를 즐겼고 한국 문화도 잘 알고 이해했기에 우리 카투사 사병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무척 잘해주어서 섹션의 책임자이자 상급자라기보다는 오랜 친구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8월의 불볕 태양 아래 이렇게 차를 몰고 떠돈 것이 벌써 4일째였다. 서울에 본부 중대가 있는 우리 부대는 수송 부대라는 특성상 전국 곳곳의 주요 미군 기지에 파견부대를 두고 있었고 이번 TDY(출장)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파견근무자들의 화생방 장비를 점검해주고 이상이 있으면 보수해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NBC(화생방) 섹션에서 단 둘이 일하는 윌슨 하사와 나는 동두천에서 시작해 의정부, 춘천, 오산, 평택, 부산, 왜관, 대구를 거쳐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군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경부 고속도로는 공사 때문에 한 쪽 길이 막혀 차들이 쉽게 속도를 내지 못했고 여름 휴가 차량들로 도로가 꽉꽉 막힌 것까지 한 몫 해 당초 대구에서 대전을 거쳐 5시간 만에 군산에 도착하려 했던 것은 그냥 우리들의 생각으로만 끝났을 뿐 꼬박 7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그동안 파견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관리 소흘로 손상된 개스 매스크 3개를 교체해주고 오염된 피부를 제독할 때 쓰는 M291 키트 몇 개를 분실했다고 해서 다시 지급해줬을 뿐 일 자체는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고속도로를 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는 피곤이 쌓여 몸이 말이 아니었다.
"써전 윌슨! 이제 오늘 밤만 군산에서 자고 내일 일을 마치면 서울로 갈 수 있겠군요.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이젠 지쳤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 자네가 한 일이 뭐가 있다구? 내가 4일 내내 운전하는 동안 옆에서 졸기밖에 더 하지 않았나?"
"아니, 써전 윌슨! 각 사무실에서 일일이 사람들 개스 매스크에 이상이 있는지 체크하고 서류 정리하고 한 건 누군데요?  4일 동안 그저 옆에서 커피나 홀짝거리며 뻐끔 뻐끔 담배만 피웠지 한 일이 뭐가 있다구."
"하하, 이런 내가 한 방 먹었군. 그래서 오늘 밤은 내가 한 잔 산다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마지막 날이라 부담도 없으니까 근사하게 마셔 보자구. 나도 군산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전에 A타운이라는 곳을 간 적이 있지. 이태원하고는 좀 틀리지만 홀이 넓은 클럽도 많고 무엇보다도 여자들이 죽여 준다구. 오늘 거기로 가는 거야."
"A타운이라...  A가 무엇의 약자인가요?"
"원래는 어메리칸 타운(American Town)인데 그냥 A타운으로 부르더군."
으레 미군 기지 주위에는 미군들만 전문으로 상대하는 클럽이나 가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알고있지만 마을이라니... 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실, 나는 친미주의자도 반미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그들끼리 미국인의 마을로 통용되는 곳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윌슨 하사는 잠시 내 뾰로통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코퍼럴 리! 그렇게 이상한 얼굴 표정 짓지 말라구. LA에 가보면 말이야. 코리언 타운이 있지. 아마 자네도 들어 봤을 거야. 거기는 간판도 한국어고 거리에는 온통 한국 사람들 천지야. 미국인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지. 또 차이나타운도 그렇구. 마찬가지라구. 그냥 그러려니 생각해. 또 이상하게 이태원에 처음 갔을 때처럼 민족의 자존심이니 그런 것 들먹이지 말구."
역시 윌슨 하사였다. 내 꿍한 기분을 눈치챘는지 한 발 앞서 먼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이태원이나 A타운 같은 곳이 우리나라에 있는데 대해 윌슨 하사가 비난 받거나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윌슨 하사에게 좋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써전 윌슨! 코리언 타운은 A타운처럼 술 마시는 클럽들과 미군들을 상대로 몸 파는 여자들만 있는 곳은 아니죠."
내 대답에 윌슨 하사는 약간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말했다.
"나도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에 와 있는 미군들은 하나같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지 않나? 가족, 친구, 애인과 떨어져 타국에서 근무하는 외로움과 스트레스 거기에 성적인 문제 같은 걸 해결해줄 분출구가 필요하지. 물론 강간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그런 머더 퍼커도 있지만 그건 그 미군 한 개인의 문제이지 그걸 미군 전체로 확대시켜서 주한미군 전체를 범죄 집단으로 매도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는거지... 만약에 한국이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그 곳에 한국군 기지가 생긴다면 그 주위에도 한국군을 상대하는 곳이 생길 것이고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기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을 거야. 미군들에게 부대 주위의 기지촌은 없어서는 안 될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곳이라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라고나 할까..."
"윌슨 하사 말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입장에서 다른 나라의 군대가 와서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죠. 전 윌슨 하사  개인은 좋아하지만 미국은 너무 욕심이 많은 나라 같아서 좀 얄미울 때도 많아요...  이런 이야기해서 뭘 어떻게 하겠어요? 나라가 반으로 나누어져 있고 우리나라가 힘없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지..."
아직 미군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을 때, 나는 가끔씩 인종적인 우월감과 세계 최강이라는 뒤틀린 자의식으로 가득 차서 우리 나라를 비하하고 얕보는 태도를 취하는 조금 덜 떨어진 미군을 볼 때면 울컥 화가 치솟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군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굳이 내가 미군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본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나 아파치 헬기, F16 전투기, M1 에이브럼스 전차 같은 것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전쟁 억제력 측면에서 꽤 북한을 압박하는 큰 요소였으니 말이다. 한국군 장교들도 공공연히 불행한 일이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자주국방의 능력이 없으니 미국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예쁘게 포장해서 이것저것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미국의 제국주의 근성은 기분이 나쁘지만, 좋은 점들은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거부하고 될 수 있으면 사이 좋게 지내면서 도움 받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얻어내자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미군들을 상대할 때도 정말 착하고 인간성이 좋은 미군은 가끔씩 실시되는 화생방 훈련 때 어지간하면 합격을 시켜 주고 '난 김치 냄새가 역겨워, 우리가 떠나면 너네는 북한에 당장 넘어 갈 거야'라고 주절거리는 놈은 제대로 잘 해도 몇 번 씩 개스 매스크를 벗었다가 다시 쓰게 만들고 뜨거운 땡볕에서 두터운 화생방 보호의를 입고 몇 시간씩 여기 저기 돌아다니게 만든 적도 있었다. 만약 항의를 하면 훈련에 불성실하게 임한다고 섹션 책임자에게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내가 주한 미군에 대해 내린 결론은 필요악이라는 것이었다.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

군산 에어 베이스(Air base)의 메인 게이트를 통과해 빌레팅 센터에 가서 10달러씩을 지불하고 윌슨 하사와 나는 우리가 묵을 숙소로 들어갔다. 1인용 침대 두 개와 샤워실에 냉장고, TV, 에어컨...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군복을 벗고 우리는 차례로 샤워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먼저 샤워를 했던 윌슨 하사는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 사이 자판기에서 뽑아왔는지 버드 와이저 하나를 던져 주었다.
"샤워를 한 후에 맥주가 마시고 싶다고 했지? 시원하게 들이키라구!"
가끔씩 나는 30살의 윌슨 하사가 꼭 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식당을 가도 나를 앞줄에 세우고 일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고 어쩌다 밤에 잔 두 개와 짐빔 같은 걸 들고 내 방으로 찾아오는 그에게서는 왠지 모를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아마 내가 미군을 필요악이라고 나마 인정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와의 친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캬하! 고마워요. 이거 정말 시원하고 좋은 걸요."
"자, 빨리 마시고 나가자구. 벌써 6시야. 저녁 먹고 A타운에 가면 7시쯤 되겠군. 오늘은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거야. 그냥 곱게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알겠나? 체리보이!"
"이런, 또 시작이군요. 전 싫어요. 그냥 술만 마시다가 들어 올 테니까 써전 윌슨이나 재미 많이 보도록 해요."
"이것 봐! 코퍼럴 리! 20살이 넘도록 여자와 한 번도 자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젠장, 내가 돈까지 내준다는데 말이야. 거기에다 A타운에는 한국 여자들 뿐 아니라 필리핀 여자들도 있는데 다들 늘씬한 미녀들이라구. 아마 가면 생각이 달라질걸. 하하하!"
윌슨 하사는 서울에 있을 때도 가끔씩 주말 밤 이태원에 가서 돈으로 여자를 사서 자고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섹스를 정기적으로 해 주지 않으면 성기능에 장애가 온다며 섹스도 하나의 근사한 스포츠이자 남녀간의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나는 특별히 도덕적 관념이 투철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왠지 돈을 지불하고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는데 거부감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윌슨 하사는 내가 여자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야 한다며 기회만 되면 내게 여자를 붙여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 운운하며 정중히 거절하곤 했다.
  게이트 앞에 있는 조그만 중국 음식점에서 윌슨 하사와 나는 간단히 요기를 하고 택시를 탔다. A타운은 캠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5분쯤 가자 파란색 바탕에 하얀 색 글씨로 어메리칸 타운(American Town)이라고 써진 푯말이 보였고 그걸 따라 우회전을 해서 조금 가다 보니 A타운이라며 기사가 우리를 내려주었다. 나는 뭔가 근사한 거리를 기대했었는데 조그만 건물들이 클럽이랍시고 궁색맞게 옹기종기 모여있을 뿐 A타운은 지저분하고 좁고 이태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대충 마을 안의 거리를 둘러보니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로 클럽 20개 정도와 노래방, 음식점 몇 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첫번째로 들어간 클럽은 뉴욕 클럽이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서른평 남짓한 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줄을 맞춰 놓여있었고 중앙에는 스테이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초저녁인데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기타와 하모니카 음이 섞인 컨트리 송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거리는 윌슨 하사는 기분이 몹시 좋은 듯 했다.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내일 일정과 남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내일이 마지막이라 속이 시원하다는 눈빛을 지으며 때맞춰서 나온 맥주를 마셨다. 나는 망나니 같은 미군이 아닌 윌슨 하사 같은 좋은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윌슨 하사가  미국으로 언제 떠날 것인지 궁금해졌다. 내가 알기로는 올 해 12월이 그의 해외 근무가 끝나는 때였다.
"써전 윌슨! 그런데 12월이 되면 한국을 떠날 건가요?"
"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한국을 무척 좋아한다네. 글쎄,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이 좋고 좁기는 하지만 이 나라가 꽤 마음에 든다구. 거기다 피둥피둥 살찐 돼지 같은 미국 여자들보다 한국 여자들이 더 좋고, 더군다나 내게는 쟈니가 있으니까 여기에서 다시 한국 여자와 재혼을 해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국 근무 기간을 연장해서 1-2년쯤 더 있다가 갈까봐."
"그럼, 제가 제대할 때까지 같이 일하겠군요."
"그런 셈이지. 왜, 좋은가?"
"좋기는요? 지겨워서 그렇지. 2년 동안 거의 날마다 사무실에서 똑같은 한 사람과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요? 윌슨 하사가 늘씬한 금발의  미녀나 된다면 모를까."
"하하, 좋아. 그럼 계획했던 대로 12월에 당장 떠나도록 하지. 혼자서 잘 해보게나. 친구! 내 후임으로 성질이 고약하고 멍청한 녀석을 하나 부탁해놓고 갈 테니까."
"안돼요. 써전 윌슨! 농담이라구요. 그냥 헤어지기 싫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쟈니는 한국으로 불러 올 생각 없어요? 계속 그렇게 그냥 미국에 놓아 둘 건가요?"
윌슨 하사에게는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5살의 쟈니라는 아들이 있었다. 사진으로만 본 적이 있는 쟈니는 한국 사람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윌슨 하사와는 달리 피부도 적당히 구릿빛을 띄고 있었고 얼굴에서도 동양인의 특징이 금방 드러났다.
"나도 쟈니 생각만 하면 괴롭다네. 지금 아버지 집에서 누이와 어머니가 같이 기르고 있긴 하지만 내 자식이 아닌가? 하지만 쟈니를 한국에 데려온다 해도 내가 일하는 동안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쟈니를 위해서라도 빨리 재혼을 해야 될 텐데 말이야."
나는 얼굴 표정이 어두워지는 윌슨 하사를 바라보면서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병이 다 비어 버리고 윌슨 하사는 맥주를 더 시켰다.
"내가 자네한테 왜 이혼했는지 말 한 적이 없었지?"
그랬다. 윌슨 하사는 쟈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이혼한 아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자신이 밝히지 않는 이상 굳이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항상 덮어두곤 했었다.
"내가 24살, 동두천에서 2년 동안 근무할 때 아내를 만났지. 어느 클럽에서 일하던 여자였는데 그 때는 서로 사랑했으니까 결혼을 했고 난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갔다네. 하지만 군인이라는 직업이 그렇게 속 편한 건 아니지. 그 때는 전투 보병 부대에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나가면 몇 달씩 집을 비울 때도 있었으니까. 아내는 아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외로웠나봐. 자꾸만 한국으로 가자고 졸라대곤 했었다네. 그런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어느 날 부터인가 나는 항상 술에 취해있고 신경질만 내는 아내를 보게 되었지. 쟈니를 생각해서라도 난 그녀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한 번은 콜로라도에 한 달간 야전 훈련을 떠났다가 예정보다 이틀 일찍 돌아오게 된 때가 있었지. 집에 들어오니까 3살 난 쟈니는 거실에서 혼자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거야. 나는 놀래서 쟈니를 얼른 품에 안고서 달래주었지. 처음에는 쟈니를 혼자 놓아두고 외출을 한 아내한테 너무나 화가 나서 잘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니 침실에서 음악 소리가 나더군. 난 쟈니를 안은 체로 침실로 가보았어. 방문을 여니까 어떤 한국 남자와 아내가 벌거벗은 체 한창 재미를 보고 있더군. 둘은 코카인까지 한 듯 했어. 흐리멍텅한게 정신이 거의 없어 보였으니까. 내가 온 지도 모르더군. 나는 쟈니를 쇼파에 내려놓고 벽에 걸려 있는 사냥용 장총을 집어들었지. 총에 총알을 집어넣고 장전을 한 뒤 방문을 발로 걷어차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어. 그리곤 침대에 총 한 방을 쏘았지. 그제야 둘은 내 존재를 알아차리더군. 난 그 머더 퍼커를 거의 반 죽을 정도로 흠씬 패줬지. 아내는 부들부들 떨면서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더군. 그 정도로 끝나길 다행이었어. 그 때 내가 만일 그 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없을 테니까. 그 다음 날, 난 바로 이혼 서류를 만들었어. 쟈니를 내가 기르는 조건에 위자료를 얼마간 지불하기로 하고 서류에 서로 사인을 한 뒤 우린 깨끗이 헤어졌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픔은 사라지고 그냥 흉터로만 남듯이, 담담하게 말하는 윌슨 하사에게서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만 남은 듯 했다.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써전 윌슨! 아직도 아내를 미워하고 있나요?"
"자네 같으면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 후후, 하지만 지금은 다 잊었어. 아내를 잘 돌보아주지 못한 내 잘못도 있구. 난 다만 나와 쟈니를 이해해주고 사랑해 줄 새 여자를 만나고 싶을 뿐이야."
"쟈니의 엄마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꼭 그 여자의 잘못만은 아닐 거예요. 외롭고 쓸쓸해서 아마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제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는 못된 미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전체를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윌슨 하사도 엑스 와이프(ex-wife)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 한 구석에 한국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런 것 있으면 안돼요. 미군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 한국 사람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으니까요. 알았죠?"
"꼭 어른처럼 말을 하는군, 아직 총각 딱지도 떼지 못한 어린 친구가 말이야. 하하! 리! 난 한국이 좋아. 내가 자네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게나. 자, 우리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고 술이나 더 마시자구!"
"좋지요. 신나게 한 번 마셔보자구요!"

우리는 뉴욕 클럽에서 나와 그 뒤로 오리엔탈, 영11, 파라다이스, 킹 클럽 등등 10여군 데를 돌면서 계속 술을 마셨는데 어느 정도 밤이 깊어져서 그런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럽마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수영복만 입은 여자들이 시끄러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는데 다른 클럽과 달리 사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클럽은 춤추는 여자들의 생김새가 왠지 보통의 한국 여자들과는 달라 보였다. 나는 윌슨 하사에게 물었다.
"써전 윌슨! 여자들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한국 여자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제대로 보았군. 저들은 필리핀 여자들이야. 얼굴형이 좀 둥글고 피부색이 약간 더 검은 것 같지 않나?"
필리핀 여자들이라니, 왜 저들은 이 먼 한국땅 기지촌 한 쪽에서 성조기가 그려진 수영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단 말인가? 나는 이상한 생각에 그들을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3명의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제일 오른쪽에서 춤을 추는 여자는 뭔가 이런 데서 춤추는 여자들과는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옅은 화장을 한긴 머리에 앳돼 보이는 얼굴의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윌슨 하사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얼이 빠져서 바라보고 있는 거야? 오호라! 저기 제일 오른쪽 여자군. 흠, 괜찮게 생겼군. 저 여자가 마음에 드나 보지? 좋아. 잠깐만 기다리라구."
항상 뭔가를 정하면 주저 없이 해버리는 윌슨 하사는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주인 여자를 불렀고 귓속말로 뭐라고 하며 달러 몇 장을 건네주었다. 50대로 보이는 늙은 여자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잠깐만 기다려 보라구. 춤을 다 추고 나면 여자 둘이 우리 테이블로 올 거야."
"써전 윌슨! 전 그냥 보기만 했을 뿐이에요. 왜 그랬어요?"
"허! 아무 소리 말고 오기만 기다리라구."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 긴장이 되었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왠지 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쓱해서 그냥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는데 여자 두 명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난 당황해서 가만히 앉아있는데 넉살 좋은 윌슨 하사가 먼저 말을 했다.
"반갑군요.아가씨들! 나는 윌슨이고 이 친구는 리라고 하죠. 흠, 거기 왼쪽 아가씨는 여기 리를 보도록 해요. 이 친구가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니까. 하하!"
그녀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는 내가 평소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액센트와 억양의 영어로 말을 했다.
"미국인이에요? 꼭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데..."
"바로 봤어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음, 한국 군인인데 미군에 소속되어 일을 하고 있죠."
나는 예쁜 여선생님 앞에 선 수줍은 학생처럼 약간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렇군요. 저처럼 억양이나 발음이 이쪽 미군과는 좀 다르군요."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꽤 짙은 눈썹에 큰 눈, 오똑한 코에 얼굴은 잡티 하나 없었고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는 술을 더 시키고 조금은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윌슨 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불렀다. 홀의 한 쪽으로 가서 그는 지갑을 꺼내고는 50달러 짜리 지폐 몇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난 그만 여자와 함께 나가겠네. 내일 아침 8시에 숙소에서 보자구. 자네가 내 호의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나? 체리보이!"
그리고는 다시 테이블로 가서 여자와 함께 일어났다. 자리를 떠나면서 윌슨 하사는 큰 소리로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돈 씽크, 버디! 져스트 인죠이 투나잇!(Don't think, buddy! Just enjoy tonight!)"
나는 내 맞은 편에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약간 변하는 걸 바라보며 무안해짐을 느꼈다. 얼마 후 그녀는 내 동의를 구하는 듯 잠깐 내 얼굴을 보더니 그만 일어나서 나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해있었는데 그녀와 함께 한 뒤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멀쩡해지는걸 느꼈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잡고는 울긋불긋한 네온 간판 아래 사람들로 넘쳐나는 좁은 골목길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손만 잡은 체 아무 말없이 갔지만 나는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1인용 침대 하나에 작은 냉장고와 간이 옷장, 화장대, 선풍기가 전부였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할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이름이 뭐지요?"
"이름이 그렇게 중요 한가요? 여기에서는 다들 신디라고 부르지요. 물론 진짜 이름은  아니구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처음이에요. 하지만 왠지 당신은 이런 곳을 찾아다닐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원래는 서울에 부대가 있는데 잠깐 군산에 출장 왔다가 여기 오게 되었죠.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해요. 그런데 필리핀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사람 사는데 꼭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때로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게 인생이잖아요. 보다시피 전 돈을 벌려고 왔어요."
살다 보면 그냥 모른 체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였는데 나는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꼭 이런 식으로만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죠? 맞어요. 저도 처음에는 몰랐으니까. 생각보다 액수가 큰 돈을 주고 그냥 관광 업소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걸로 알고 왔는데 오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지요."
"미안해요. 전 그냥 별 생각 없이 물었던 건데..."
말하는 것이나 생김새를 면면히 살펴보아도 확실히 그녀는 이런 곳에서 일하는 흔한 그렇고 그런 여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짤막하지만 나는 그녀를 통해 필리핀에서는 영어와 따갈로그(Tagalog)라는 두 가지 말을 사용한다는 것과 한국과는 1시간의 시차가 난다는 것, 약 7000만 명의 인구, 고온 다습한 기후, 스페인과 미국에 지배를 받았던 역사 같은 단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별로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휴학을 하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 집안도 돕고 학비를 벌려고 했던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밤은 더 깊어만 가고 그녀도 나에게 싫지 만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가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여자 친구는 없나요? 당신은 인상도 좋고 다정다감하고 꼭 여자 친구가 있을 것 같은데?"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저한테서 떠나갔지요."
"아니, 왜요?"
"신디는 꿈이 뭔가요?"
"갑자기 꿈이라니요? 글쎄, 전에는 학교를 마치고 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싶었어요.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고 영화나 TV에서 본 미국은 필리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괜찮은 나라였거든요. 그곳에서 훌륭한 바이올니스트로 활동하는 것이 제 꿈이었죠. 하지만 여기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다 보니까 왠지 내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 당장은 내가 목표로 한 돈을 빨리 모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했나요?"
"제 여자 친구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죠. 어느 날 오랜만에 부대로 찾아온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회사에서 자꾸만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접근해오는데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제 여자 친구는 내게 꿈이 무어냐고 물었었죠. 저는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말을 했는데 여자 친구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넌 꿈이 참 작구나라는 말을 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갔거든요. 아마 제 꿈에 실망했었나 봐요."
"그래요? 꿈이 무엇인데요?"
"제 여자 친구처럼 듣고 나서 웃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음, 제 꿈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것이었죠. 누구나 한 번 읽으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런 글 말이에요. 아마도 제 여자 친구는 내가 어떤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나 봐요. 남들이 다 인정해주고 돈과 명예가 함께 하는 그런 것들 말이에요. 좀 지나치게 현실적인 여자였죠. 그런데 한 가지 우스운 건, 전 항상 제 꿈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넌 꿈이 참 작구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꼭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더라구요. 그 꿈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건데...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글만 쓴다고 해도 이루기 힘들 거에요."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아! 정말 멋진 그리고 큰 꿈이군요. 제 꿈과는 좀 다르지만... 그런데 지금도 그게 꿈인가요?"
"아뇨, 그 일이 있은 후로 생각을 바꾸었어요. 다른 거라면 아무거나 좋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글을 쓴다는 따위의 그런 꿈은 가지지 말자. 뭐, 대충 그런 걸루요."
그녀는 한 동안 아무말이 없었다.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하이페츠가 연주한 비탈리의 샤콘느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바이올린 연주곡인데  오르간 전주로 시작해서 바로 이어지는 바이올린음은 비장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무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곡이죠. 당신의 방금 대답은 꼭 그 비탈리의 샤콘느를 듣는 것 같아요. 그 여자를 참 많이 사랑했었나 봐요. 그런 대답을 하다니... 글쎄, 당신은 뭔가 좀 특별한 사람 같아요. 전 지금까지 제가 살아가는 것도 벅차 남자 친구 같은 것은 없었지만 후에 남자 친구를 사귄다면 당신 같은 사람과 사귀어 보고 싶은 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쑥스러워 그녀로부터 눈길을 돌리려 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입술을 가져왔다. 그녀의 약간 거친 숨소리와 입김,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짙은 플로랄향에 나는 아득해지는걸 느끼며 그녀를 꼭 안고는 길게 키스를 했다. 하지만 왠지 오늘 밤 그녀와 잠을 자서는 안된다는, 그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디! 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신디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가만히 누워 있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겠죠?"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품에 안겼다. 얼마 후 그녀는 잠이 들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소설에 나오는 양치기처럼 곤히 잠든 신디를 밤새도록 지켜주었다.   

3

"1년 만인가요?"
영풍문고에서 책 몇 권을 사들고 나오던 나를 가로막으며 던진 그녀의 첫마디였다. 나는 잘못 배달된 편지를 받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머리를 그렇게 길게 하고 있으니까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했어요. 제대 했나보죠?"
"정말 뜻밖인데요.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난 내 목소리가 어색함으로 나무토막처럼 조금 딱딱하게 굳어있는 걸 느꼈다.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말했다.
"그렇게 바쁘지 않다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다시 만나게 된데 대한 제 반가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어때요?"
  헤븐(Heaven)이라는 이름을 가진 까페에서 그녀는 헤이즐럿을, 나는 마운틴듀를 시켰다. 그녀는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약간 지친 듯한 어두운 그림자가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때론 작은 미소 하나가 백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서울에는 무슨 일이죠? 정말 깜짝 놀랬어요. 군산하고 여기는 꽤 먼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이런 것이 인생 아닌가요? 어쨌든 참 반갑군요."
"저도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너무 반가운걸요.그런데 서울로 옮겨왔나요? "
"그런 건 아니구, 이제 한국을 떠나게 됐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서류도 처리하고 비행기표도 끊고 일 처리할게 있어서 서울로 왔죠."
"아! 그래요? 축하해요. 이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거군요."
"아뇨, 필리핀이 아니라 미국으로요..."
나는 그녀의 처지에서 그녀가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약간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려는 듯 그녀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군산에서 미군을 한 명 알게 되었죠. 토마스라고 1주일 전에 결혼했어요. 법적인 서류 작업도 끝냈고 3일 후에 시카고로 갈 거예요. 그 사람 집이 거기에 있거든요. 그 곳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고 음악을 할거에요."
그녀는 그 말로는 뭔가 부족한 걸 느꼈는지 토마스라는 미군이 자신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너무 잘해준다며 자신 역시 미국으로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 한 거라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이야기는 그녀가 내뿜는 하얀 담배 연기처럼 공허하게만 들렸다. 갑자기 그녀는 뭔가 불현듯 생각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날 생각나요? 당신 정말 너무했어요. 그렇게 가버리는 법이 어디 있나요? 나, 다음 날 아침에 많이 울었어요. 당신이 남기고 간 50달러 짜리 지폐 3장, 내게는 정말 큰돈이었지만 그냥 찢어 버렸죠.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었던 그 때의 생활에서 당신과는 정말 짧은 만남이었지만 잊을 수가 없었어요. 저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날 새벽 고이 잠 든 그녀에게 인사도 없이 50달러 지폐 3장만 방에 남겨두고 떠났었다. 다음 날 아침, 창가로 들어오는 아득한 햇살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잘 있으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나는 한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윌슨 하사는 내가 여자를 알게 돼서 그런다고 의미 있는 눈빛을 보내며 그런 여자는 하룻밤이면 족하다고 빨리 잊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그냥 주말에 군산으로 다시 한 번 가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것은 그냥 생각으로 그쳤을 뿐 그러다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했다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만약 그 날 아침,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짧은 키스를 한 번 더 나누고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면 그게 어떤 대단한 의미 있는 일이라도 되었을 것 같아요? 전화번호를 교환해 가끔 전화하고 서로 만나고 그랬으면 뭔가가 이루어졌을 것 같냐구요? 그건 그냥 하룻밤으로 족한 만남이었어요. 당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잖아요!"
나는 나도 모르게 거칠어지고 높아진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 때 그녀를 미국으로 데리고 갈, 아니 미국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 줄 힘이 없는 그저 뭔가 아름다운 글 하나를 남기고 싶어하던 하나의 몽상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슬펐죠..."
이렇게 해서 그녀와 나의 인연은 그 결말을 본 것일까. 그 뒤로 우리의 대화는 김빠진 맥주처럼 시들해졌다. 나는 6개월 전 제대를 해 친척집에 있으면서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과 다음 학기에 복학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녀는 3주전에 서울에 왔고 시카고에 관한 책을 구하러 영풍문고의 외국어 서적 코너에 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나는 문득 윌슨 하사가 생각났다. 윌슨 하사는 끝내 내가 제대할 때까지 같이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중사로 진급하면서 부산에 있는 화학대대로 옮겨갔고 거기에서 근무하다 한국여자를 만나 내가 제대할 무렵 미국으로 떠나갔다. 그가 가기 전에 서울에서 그의 부인과 같이 저녁을 함께 했는데 둘 다 잘 어울리고 그 여자도 괜찮아 보였다. 나는 신디가 말한 토마스란 미군도 윌슨 하사처럼 좋은 사람이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4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것이 우연이었던 필연이었든 간에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그런 사람이 있다. 헤븐(Heaven)에서 나오면서 나는 신디와 나의 만남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천국(Heaven)에서 나오고 나니까 다시 또 현실이군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마치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말을 했다.
"그래요. 잘 가요. 미국에서의 생활, 행운을 빌께요!"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했다. 서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녀가 까페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적어 놓은 내 전자우편 주소와 전화 번호가 담긴 메모지를 꺼내고 싶어서 였다. 그 순간 그녀가 손을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나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메모지를 미처 꺼내지 못하고 그냥 빈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하얀 안개꽃 같은 엷은 미소를 한 번 짓고는 뒤로 돌아섰다. 나도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몇 발자국을 걸었다. 그러다 나는 불현듯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바쁘게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한동안 가만히 서있다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구깃구깃해서는 길 한 쪽으로 흘려 보냈다. 그 구겨진 메모지가 굴러가다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걸 보고 난 꼭 내 몸이 짓밟히는 것 같은 아픈 통증을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온 몸으로 생생하게 느끼며 받아들이고 있는 이 아픔이 곧 생(生)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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